2002년 1회 개인전_모인화랑(자평-작가노트)

작업에 대하여

이번 작업은 내 스스로를 눈으로 확인해 보겠다는 욕심의 결과물이다. 작업실에서 화면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내내 무언가의 도구를 화면에 갖다 대었고, 그때마다 생기는 이미지들이 그 화면에서의 작업을 끝낼 때에도 결코 완전히는 사라지지 않도록 남겨놓으려 했다. 그리고 이렇게 부지런히 흔적을 남기는 작업은 한 화면 위에서 될 수 있는 한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쉼 없이, 오랜 기간에, 많은 흔적을 남기면, 작업의 결과물은 내 손과 팔과 어깨가 한 일을 다시 나에게 성실하게 보여준다.

다시 한 번 여기에 적어놓고 보면 그 과정은 계속되는 조그마한 움직임으로 꽉 차 있다. 먼저 한지에 채색화 방법과 유사하게 아교방수처리를 해주고, 그 위에 흰색안료로 20-30회에 걸쳐 얇게 전체화면을 포수해 준다. 바탕화면처리로 흰색안료인 티타늄 화이트를 사용하는데, 이 안료는 도포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은폐력도 좋아서 밑바탕처리를 하는 데는 아주 좋다. 이런 바탕화면처리는 한지의 흡수력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화면의 견고함을 준다. 흰색안료의 포수된 상태의 여부에 따라 그림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에 본인의 작업에서는 가장 중요하고도 예민한 부분이라 하겠다.

견고한 바탕이 형성되면 이 위에 먹으로 화면 중앙 부분에 미리 에스키스된 형상을 그려 넣는다. 그런 후 송곳이나 나이프로 이 형상을 다기 긁어주기도 하고 뭉개기도 하고 문질러 주기도 하면서 반대로 화면에서 없애는 작업을 한다. 이제 화면에는 ‘형상(形象)’은 사라지고 ‘선(線)’이 나타나게 된다. 본인의 작업에서는 선은 붓에 의해 그려지는 것이 아닌 형상을 지우면서 남는 흔적에 의해 형성된다. ‘계획된 형상’이 ‘만들어져 가는 선’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러한 선은 어떠한 도구를 사용하느냐, 얼마만큼의 손에 힘을 부여하느냐, 흰색안료가 얼마만큼 견고하게 포수되었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획득될 수 있다. 속도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하고, 굵기도 하고, 얇기도 하면서....

이런 노동을 하면서 느끼게 마련인 감각적인 즐거움은 쾌락과 같이 강한 감정이 아니어서 소박하다. 수 십번 포수된 바탕 위에 그려진 형태를 없애고 다시 처음의 바탕지로 돌아가는 순환적이 행위를 통해서 본인은 ‘素’의 개념을 구현해 보고자 했다. 바탕지를 만들기까지의 많은 시간과 노동 그리고 이를 다시 지워가면서 얻게 되는 또 다른 노동의 흔적인 ‘선들의 집적’으로부터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된다. ...바탕을 만들고 ...다시 바탕으로 돌아가는 ...이런 내 작업에서 지나치지 않는 즐거움을 발견한 것 같다. 이렇게 나름대로 공자가 말한 내면수련까지 겸하고 있다고 내 작업을 공자의 “인(仁)”사상에 붙여보는 것도 또 다른 가벼운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