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진실, 그리고 그 너머
김형숙(서울대 동양화과 교수)
과연 동양화는 서양화와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는가, 그리고 서양화와 동양화의 경계를 짓는 요인은 과연 무엇인가.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에 과연 동양화의 정체성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 동양화와 서양화는 서로 대척 지점에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한 전시가 소마미술관과 표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림의 대면(對面): 동양화와 서양화의 접경(接境)> 전시는 동양화와 서양화가 만나는 교차지점을 다섯 개의 장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관념과 실경' '성격과 표면' '생태의 회화' '문화의 물성' '풍경의 생산'으로 국내외 평면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모였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다섯 카테고리로 묶어낸 것에 약간의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국내외 작가들의 작업 경향을 이러한 비평적 시각으로 틀 지워 보았다는 점에서 <그림의 대면>전의 의미가 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교차점
'관념과 실경' 섹션에서는 허백련에서부터 김수진의 <사인암> 수묵화, 그리고 민정기의 <벽계구곡>을 통해, 관념 산수에서 현대의 실경 산수까지 보여주고 있다. 다른 작가들이 동양화의 기본적인 재료를 통해서 관념적 세계를 그려내었다면, 민정기는 기운생동을 서양의 재료를 통해서 구현하고 있는데, 우리 산천의 굽이치는 계곡들을 기운생동의 필선을 통해서 그려내었다. '성격과 표면'에서는 인간의 표정을 통해 그 다면적 성격을 회화평면에 재현했다. 박기일의 은 스테인리스 판에 자동차 페인트로 사람의 얼굴을 그려, 사실적 인물 초상에 눈동자를 파내고 여드름 난 자국과 땀구멍이 뚫린 표면이 그대로 나타난 '마스크'와 같은 효과를 보인다. 미키 카미의 <엄마>와 <할아버지>도 박기일의 작품과 같은 맥락에서 논할 수 있다. 실핏줄의 피부와 입가의 주름이 극사실적으로 나타난 유화작품은 마치 사진으로 재현할 수 있는 기법적 특성을 넘어서기까지 한다. 인물의 표정과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처리된 선들과 안료로 표현된 가느다란 실핏줄은 고단하고도 노쇠한 인물의 허탈한 표정을 나타내고 있다.
'생태의 회화' 부분은 회화 내적인 문제보다는 회화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들을 조명했다. 유근택의 <어떤 만찬 (A Certain Dinner)>은 둥근 원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접시, 나이프, 포크, 술잔, 그리고 중앙에 높이 솟아오른 오브제들, 먹다 남은 음식들을 통해서 만찬이 끝난 후의 풍경을 보여준다. 휘몰아치는 듯한 붓터치와 튀어오르는 듯한 안료 덩어리들은 부재의 공간, 잔치가 끝난 후의 공허한 공간을 보여준다. 마세오 몬토야(Maceo Montoya)는 <기억> <징후>를 통해서 극적이고도 불안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징후>는 대지에서 일을 하고 있는 군중들 속에서 한 사람이 쓰러질 듯한 포즈를 보이며, 어떤 불길한 징후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화면의 대지와 그와 대비해서 검은 구름과 하늘은 불길한 징후를 만들어내었다. <기억>은 12명이 축구놀이하는 풍겨이다. 오른쪽과 왼쪽에 앙상한 가지를 가진 나무들, 공을 차느라고 멀리 뛰어오른 사람 밑으로 뚫린 시작로들은 1점 소실점을 통한 공간을 나타내면서 근대화된 공간 속에서 과거의 축구놀이 풍경을 보여주는 듯하다. 몬토야의 작품들은 대개가 어듭고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하는데, 그의 석판화 작품에서도 해먹의 느낌과 드로잉적 선묘 표현을 통해 어떤 징후가 나타날 것 같은 세기말적인 극적인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유근택, 몬토야가 제시하는 생태 회화는 회화 내적인 본질의 문제보다는 회화와 주변 환경,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들과 환경과의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제시들은 현대사회의 불안함과 소외, 그리고 불길한 징후들을 극적인 효과를 도입하여 보여준다. 연극적 요소는 화면상의 극적 구성(유근택), 그리고 명암의 극적인 대비(몬토야)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용국의 <유기적 정원>은 몬토야와는 다른 차원의 생태적 회화의 장을 열고 있다. 정용국은 수묵으로 꽃과 잎, 줄기, 넝쿨들이 어우러진 유기적 정원을 만들었다. 넝쿨과 작은 나무가지들이 한데 어울려 구성된 공간은 꽃이 엉켜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줄기에 새가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장지 위의 수묵의 농담은 묘하고도 섬세한 공간을 만들어 내어 동양의 정신적 공간, 정원을 구성한다.
네 번째 전시 공간 '문화의 물성'에서는 송윤주가 <소(素)-상(象)>을 통해서 끈이나 짚, 실타래를 연상시키는 대상물을 한지에 흰색 안료를 입히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여 그 위에 송곳 자국 같은 선으로 그리는 작업으로 작가의 실존을 물성을 통해 드러낸다. 작가의 신체의 움직임의 층위를 담고 있으나, 종국에 작가가 원하는 것은 물성을 통한 회화의 진정성일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모더니즘 작가들에 의해 많이 실험되었지만, 그녀가 서양의 작가들과 다른 점은 동양화의 재료, 한지, 먹 등을 통해서 회화의 의미를 찾으며 그리기 과정을 정진의 과정처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평면 위에 그린다는 행위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듯 보인다. 어떤 의도와 주제를 미리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작업 과정 속에서 우연적 효과는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떠다닌다. 송윤주의 회화작품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마치 호흡을 그대로 드러내듯, 자신의 욕망과 제스처를 고스란히 선과 터치, 그리고 물질의 우연적 흐름 속에서 그대로 발설한다.
정주영은 '풍경의 생산'이라는 전시 공간에 남산의 풍경을 클로즈업해서 그렸고, 나형민은 미개발 지역의 동네 풍경을 가상적 공간 위에 그렸다. 정주영이 그린 남산의 모습은 사람의 눈으로 포착한 산세(山勢)라기보다는 물질문화 사회에서 기계의 눈을 빌려서 포착해낸 공간 같다. 나형민은 경제적으로 취약한 도시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이를 허공에 위치시켜 뜻밖의 의미를 읽게 한다. 그의 도시 풍경은 일상적인 틀을 넘은 신화화된 공간, 가상의 도시이다.
기억의 파편을 풀어내며
서윤희는 홍차의 물을 우려내어 종이를 찜통에 쪄내어 한지를 만들어내는 지독히도 수공예적인 제작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송윤주와 비슷하다. 둘 다 여성이다. 서윤희는 작업의 지난한 과정 속에서 솔방울이나 조개껍질들을 갈아 가루를 회화의 평면에 붙이기도 하면서 '시간성'에 대한 공간의 해석을 가한다. 마치 영겁의 세월의 겹을 나타낼 듯한 시간의 흔적을 드러낸 공간의 사이에서 서윤희는 인간의 다양한 표정과 모습을 아주 조그맣게 그려내었다. 시간의 흔적과 기억의 끝자락에서 낚시질을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뒤숭숭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나타난 인간의 모습은, 우연성에 기대면서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을 유추한다.
에서는 거대한 평면 공간 속에서 생성된 우연적인 효과들 속에서 뛰거나, 공을 차는 운동장의 아이들을 통해서 유년시절의 추억과 기억을 재생산하고 있다. 한편, <Memory 04 Traces>에서는 종이를 여러 번 찻물에 쪄내 종이결 자체가 마치 광목과 같은 효과를 보이고 그 결 사이사이로 시간의 흔적들과 개인적 경험, 기억을 보여주는 서윤희는 우리 기억의 파편을 풀어내는 작가이다.
<그림의 대면>전과 <서윤희>전은 동양화가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서양화와 어떻게 변별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정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 현대미술 속에서 지속적으로 물어 왔던 질문들이 아직까지 유효하며, 회화의 다양한 층위를 실험하고 있는 다양한 층의 젊은 미래의 작가들이 이를 풀어갈 것이라 기대하게 한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