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이후의 풍경,
또는 ‘시간 모으기-time assemblage’의 미학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一.
송윤주는 꽤 긴 시간, 긴 끈으로 겹겹이 감아 만든 뭉친 실타래 같은 형상을 그려왔다. 한지에 겹겹이 안료를 얹히고 얹혀진 안료를 다시 긁어내면서, 작품은 수고로운 노동이 투여되는 만큼만 완성되었다. 이렇듯 가하고 감하며 드러냈다가 감추고, 존재시켰다가 부재로 돌려보내는 반복적인 과정의 의미는 아마도 ‘뭉쳤다’, ‘엉켰다’, ‘잘 풀리지 않는다’ 같은 의사표현과 맥락을 같이하는 측면이 있다. 그 실타래 뭉치들은 응어리진 업(業)의 시각적 번역일 수도 있고, 인연(因緣)의 복잡성과 시간성에 대한 직관적인 은유일 수도 있다. 동시에 그것은 뭉쳐진 실타래 같았던 심정의, 그 뒤엉켰던 것들이 풀어지기 전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작가의 자전적 독백 같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 2009년에 이르면 실타래가 실존적 존재로서 인간의 은유라는 사실이 확연해진다. 그리고 그 존재의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질서가 고대문자의 모습을 하고서 등장한다.
2011년에 이르면 보존상태가 양호한 고지도 같아 보이기도 하는 <문자산수>를 볼 수 있게 된다. 얼핏 미니멀한 기호추상의 단위 같아 보이는 것들이 전체의 균형을 흩트리지 않으면서 화면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 각각의 것들이 상형문자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고, 몇몇 것들은 산이나 물, 집이나 교각을 가르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실 그것들은 모두 온전한 형태의 고대 상형문자들이고, 전체는 현재 서울의 지도다. 그렇더라도, 지도 그리기나 고대 상형문자의 가치를 피력하는 건 여기서 부차적인 요인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 풍경이 그리기와 글쓰기의 경계가 무無로 되돌려지는, 그 오래된 분리가 봉합되는 지점에서 잉태된 풍경이라는 사실이다. 이 회화, 또는 지도는 형태인 동시에 문자고, 이미지인 동시에 의미인 것들로 그려진-혹은 쓰여진- 풍경 이전의, 또는 이후의 풍경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도적으로 재현된 풍경일 수도 있고, 풍경의 미학을 도외시 하지 않는 지도라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감각이 삭감된 풍경이고, 정복의 경로를 교란하는 지도이기도 하다. 실로 흥미로운 미학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대립해온 두 세계의 경계가 부재로 돌아가고 분열은 치유된다는 점이 의미롭다. 이제 그것들은 이미지이기도 하고 기호이기도 하다. 형태로 감상되는 동시에 하천이나 도로로 읽힐 수도 있다. 제왕의 궁궐이나 서민주택들의 군락을 표시하는 기호이면서, 담채의 톤으로 된 신체를 지닌 기호 이상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형적 성과는 이 세계가 이 시대의 주류로 자리매김된 서구적이고 근대주의적인 분열의 미학과 맞서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일 것이다. 이렇듯 분열의 미학과 결별을 고하는 보이지 않는 뜨거운 탐색이 이 세계를 조율하는 내적 긴장의 출처이자 노선을 차별화하는 힘이며, 다른 회화담론을 이끌어낼 가능성의 근거이기도 하다.
송윤주는 조변석개하는 시대상황을 관통하고, 자연과 문명을 관할하는 불변의 법칙성에 천착穿鑿해 왔다. 그는, 그래서 더욱 그의 회화는 ‘지성적인 삶의 잘 견뎌내지 못하는 혼란스러움’, 이상의 부재, 변덕, 토대적 불안정성, 주관의 무절제한 개입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정제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인 일상의 변화무쌍함이 이 세계로 침입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2011년의 <해달산물나무>, <카오스모스,chaosmos> 같은 작품들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이 세계는 우주와 자연의 근원적인 질서로 다가서는 지향성을 지니며, 해와 달의 운행과 그 창대무변한 궤적, 성운星雲들, 기원起源 또는 생명의 근원을 기념한다. 별들이 그리는 타원형의 궤적을 따르는 것, 그 항구적인 이름들과 마주하고 그 지혜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오늘날 오히려 급진적인 태도로 분류되기도 한다. 오늘날은 현실을 추대하기 위해 고전을 폐기하고, 일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상을 뜯어고치는 시대이니 말이다.
이 세계는 조형과 그 미학을 조망하는 것만으론 다 설명되지 않는다. 송윤주의 회화는 형태의 형태적 근원을 찾아 나서거나 형태를 인식론적으로 잘게 쪼개보는 식의, 형태인식론의 미시적인 접근들과 등가의 것이 아니다. 서구의 전위주의 미학의 토대를 이루는 근대적 인식론과 궤를 달리하는 사유차원이 이 세계 깊은 곳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대 이후의 분열적인 인식론이 미치지 못하는 곳, 경험의 대기권 밖으로부터 오는 세계, 우주의 속삭임, 일테면 초탈하게 이성의 감각을 넘어서는, 또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앞에서 우리의 인식이 재고되는 어떤 낮고 성찰적인 사유임에 틀림없다. “모든 것을 인식하기 위해 자신을 무리하게 긴장시키는 사람은 결코 시인이 될 수 없다. 시인은 오로지 높고 넓게 뻗어나가고 싶을 뿐이다.”(길버트 체스터턴, Gilbert K. Chesterton) ‘낮은 곳’에서 말이다.
二.
전시의 제목이자 중의법重義法적인 용어인 ‘태풍太豊’에는 상충하는 두 의미가 녹아들어 있다. 발음상으론 재난으로서의 태풍颱風이지만, 문자적으론 큰 풍년을 의미한다. 작가는 내적 황무荒蕪가 성난 태풍처럼 밀려드는 이 시대를 큰 풍요의 희망으로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정신적 궁핍의 골이 깊어지는 재난의 시기인 만큼, 풍년의 위로가 더 없이 값지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현대는 자신의 고상함에 대한 기이한 착각에 붙들려 스스로 혼돈의 구덩이로 뛰어드는 시대인 만큼, 태곳적 지혜와 오래된 희망이 어느 때보다 시급하게 요구되는 시기이기도 한다.
‘태풍’에 담긴 재난과 희망의 중의적 의미는 또한 역사를 등에 업고 시대를 가슴으로 안는 역사인식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송윤주의 회화는 절리節理된 시간, 과거와 현재의 파편을 다시금 수습收拾하는 하나의 인문학적 조합을 선보인다. 문자의 기원起源을 초대해, 그 신체 곧 획과 훈에 지금 이 시대의 기원(祈願)을 엮는 것이다. 오래된 언어, 때 묻은 문장文章, 유전된 지혜로 지금 이곳의 형편을 풀어내는 문인文人의 제의(祭儀)같은 것이랄까. 이 분산된 시간을 모으고 당대적으로 조합하기, 곧 ‘time assemblage’야말로 ‘한국화韓國畵’로 명명되는 영토에서, 자주 분과주의의 오명汚名을 무릅쓰고 그 실재하는 위협과도 맞서면서, 꿋꿋하게 지켜온 고유한 하나의 사유형 아니겠는가. 비좁은 고전주의라는 것이 존재하고, 편협한 시대정신이라는 것 또한 왕성하게 존재한다. 둘 다 심대한 정신적인 위축의 원인이 되는 만큼, 시간의 분절 위에 자리한 오만한 근대의 꾐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송윤주의 회화가 지금 옛것을 단지 과거의 유산으로만 결박해 두어선 안 된다는 인식, 현재를 분절되고 격리된 역사의 불구로 인식하지 않으리라는 의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 근대近代가 기원起源을 내다버린 순간, 놀랍게도 기원(祈願)도 기도(祈禱)도 함께 소멸되어버렸다. 반면 송윤주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기원起源하는 세계다. 이 회화는 기원起源의 낮은 사유에서 힘을 얻는다. 오늘날처럼 상실을 살아가는 시기에 절실한 것이 바로 기원의 미학이다. 이 미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이상을 낱낱이 설계하다가 스스로 그 이상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거나, 초인超人의 착각 속에서 광기로 전락하고 마는 니체주의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하게 역사를 낙관하는 그러한 미학이다. 그의 회화는 말한다. 자연은 항구적으로 움직이고 순환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진보한다. 그것이 곧 고대 문자기호의 세계에 내재하는 음양의 순환질서다. 태평시대는 그 안에서 혼란을 키우고, 시련은 시련으로만 마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련의 시대야말로 큰 풍요를 구체적으로 기술해야 마땅한 시대인 것이다. 이 시대의 황무함을 보라. 하지만 그 안에서, 또는 그것의 다가오는 미래로부터 “무한히 펼쳐진 하늘과 모든 생물을 품어 주는 무한한 대지”를 발견하라! 사람들이 무너지고 절망이 쇄도해 오는 바로 그 때가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희망을 논할 때라는 것, 그것이 이 세계가 전하는 오래된 지혜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