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素)-상(象) : 비결정적 형상
So-Figure : Indeterminate Image
2006.11.15~11.21
공화랑
회화란 화가에게 있어서는 잔인한 세계이다. 거의 매일 엄청난 공을 들여, 또 그 만큼 엄청난 양을 화가가 그려댄다고 해서 소위 ‘위대한 그림’에의 성공이 즉각적으로, 측량에 따라 실현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 세계는 잔인하다. 심지어 성공에의 희미한 약속조차도 희박한 세계가 여기 그림이 생산-창조되는 영역이다. 그리기가 작가에게 부과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여기서 온다. 다른 한편 그 세계는 화가 자신이 그렸다고 해서 그림이 작가의 의도나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현상하는 ‘투명한 거울’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잔인하다. 즉 화가의 그림은 죽은 사물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때로는 자기의 창조자인 작가의 의도를 배반하거나, 때로는 그가 숨기고자 했던 비밀까지를 드러내버린다는 데 회화의 잔인성이 있다. 예를 들어 자기 감각과 지각능력의 범위와 예술적 한계, 또는 현실 사회에서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개인으로서의 구차한 욕망을 낱낱이 작품에 드러내고 싶어 하는 화가란 없다. 그러나 그림은 마치 숨을 뱉어 내듯 이러한 화가의 능력, 한계, 욕망을 평면 위에 고스란히 선과 터치의 결을 따라, 혹은 색채의 톤을 따라 발설한다. 이를 잔혹하리만치 엄격한 ‘회화의 진실성’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자, 사정이 이러하니 회화란 화가에게 여러모로 얼마나 잔인한 세계인가!
그러나 생각을 잠시 전환해 보니, 정말 한 수 위인 것은 정작 화가 자신이다. 왜냐하면 회화가 그리는 이에게 잔인할 정도로 엄격한 진실을 요구하면서도 어떤 보상도 곧바로 해주지 않는 세계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화가 자신이 그 세계를 끈질기게 부여잡고 견디기 때문이다. 화가 그 스스로를 제외하면, 누구도 그리기를 강요하거나 독려조차 하지 않는 현실에서.
송윤주의 그림들과 그녀의 작업방식과 회화에 대한 태도를 보고, 듣고, 접하면서 드는 가장 지배적인 생각은 ‘이 작가가 회화에 대해 맹목적인 신뢰와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닌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현대미술을 하는 지금 여기의 모든 작가들이 예술에 대한 신뢰와 자기 예술세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작업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는 예술 자체보다는 예술 시스템이나 특정 유행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 이해관계나 속된 말로 ‘뜨는 경향’에 따라 자기 예술세계를 정립-해체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유명-인기작가’로 포지셔닝 하기를 원한다. 날로 미술이 기분전환용 오락에 가까워지고, 그림이 팬시 인테리어 장식이나 고부가가치상품이 되어가는 것도 이러한 작가들의 태도와 일정 부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송윤주의 그림들에서 어떤 지적 유희의 계기나 어떤 세련된 문화 산물(culture+product)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작가의 면모가 현대미술에서 효과를 발휘하는 자극적이고 유동적이며 쿨한 성격과는 거리가 있고, 그녀의 회화가 소위 현대미술의 트렌드와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 화가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기 작업에서 수공(手工)의 양과 기법의 연마를 중시한다(“나의 작업이 진행되는 방향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한다.”-작가노트). 그리고 그 수행의 과정을 바로 자기 예술이 형성되는 과정이라 생각한다.(“어떠한 정답을 갖고 거기[그림]에 접근한다기보다는, 대략의 방향만 설정하고 작업을 진행하면서 중간에 변화들을 수용하면서 근접해 들어가려.......(→Article)